나와 너의 모든생각들....「Disparition 실종」이란제목의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에 가해진 실험은 제목이 암시하는 것 처럼, 내용에서 뿐만 아니라 형식상에서의 ‘실종 ’도 병행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실종은 다름 아닌 알파벳 ‘e ’의 실종입니다. 소설속의 모든단어에 e가 들어가지 않는 것이지요. 뭐 대단한 일인가 싶겠지만, 불어의 특성을 살펴본다면 이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작업이랍니다. 이유인 즉,
▷ 불어는 모든 단어가 남성/여성으로 性이 있습니다. 어떻게 구분하냐구요? -e로 끝나는 단어는 거의 여성이라고 봐도됩니다. 물론 -e로 끝나는 남성단어도 있긴 합니다. 예외 없는 원칙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예컨대 처음 보는 명사일지라도 -e로 끝나면 ‘아! 이건 여성명사로구나 ’하고 생각하면 90%는 맞습니다. 이때 여성명사에는 여성 형용사를 붙여야지요. 당연히 여성형용사도 -e로 끝납니다. 뭐, 이렇게 되면 어림 잡아도 절반이상은 -e로 끝난다고 봐야겠지요. 즉 50%이상의 단어를 쓰지 못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 관사로 오게되면 문제가 더꼬이게됩니다. 여성정관사가 ‘la’인데 반해 남성 정관사는 ‘le’이기 때문이지요. 즉, 앞에 ‘le’가 들어가면 안되니까 남성명사도 쓰기가 어렵게 됩니다. 여성명사도 못쓰고, 남성명사도 못쓰게 되면도 대체 무슨 명사를 쓴단 얘기지? 점점 미궁으로 빠져듭니다. 재밌지요? 부정관사나 소유형용사를 쓰면서 피해가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 그뿐이 아닙니다. e는 a,i,o,u와 함께 모음으로 쓰이기 때문에 조어상단어의 관절을 이룹니다. 성과 상관없이 모든 단어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단어 중간에 e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지요.
▷ 또 있습니다. 불어의 1인칭 대명사‘나 ’는 ‘je’입니다. 이소설에 1인칭은 아예 낄 자리가 없게 되는군요. 그뿐이 아닙니다.2인칭 동사는 ‘es’, 3인칭 여성은 ‘elle’,3인칭동사는 ‘est’이니까 이래저래 2,3인칭도 모두 못쓰게 됩니다. 한국어와는 달리 대명사가 발달되고 사용이 빈번한 프랑스어에서 1,2,3인칭 대명사를 모두 사용하지 못한다면 이건 아주 치명적이기까지 합니다.
이상의 이유로 인해 줄잡아도 불어단어의 80%는 e가 들어간다고 보면됩니다. 실제로 불어건 영어건 e가 가장 많이 쓰이는 알파벳이기도 하지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 마조키스트적인 소설가는 e를 선택한 것이기도 합니다. 자, 어떻습니까? 구상 자체부터 가혹하리 만치 힘든, 상상을 초월한 작업이 아닐까요? 프랑스인 누구라도 이 소설의 구상을 듣고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Impossible (불가능)!”을 외쳤습니다. 하지만 그는 해냈습니다. 이 불가능한 작업을 마치고 그가 어느 신문사와 한 인터뷰에서 매우 의미 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오래 전의기억을 더듬어보면 아마 이런 얘기가 아닐까 합니다.